1915년 미국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태어난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본명은 Eleanora Harris)는 팝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여가수이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했다. 아버지인 재즈 기타리스트 클러렌스 홀리데이(Clarence Holiday)와 어머니인 사디 해리스(Sadie Harris)는 미혼 상태에서 빌리 홀리데이를 낳았고, 클러렌스는 빌리를 사디에게 떠넘긴 채 떠나버린다. 결국 빌리는 미혼모인 사디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충격적인 것은 빌리의 어머니인 사디 역시 그녀를 낳을 당시 13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것이다.
메리랜드(Maryland)주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 아버지도 없이 어린 어머니와 살아야 했고 가난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1살 어린 나이에 강간을 당하기도 했던 그녀는 뉴욕(New York)의 브룩클린(Brooklyn)으로 이주한 뒤 어머니와 함께 매춘부 생활을 하게 되며 1929년에는 매춘혐의로 체포되어 라이커스 아일랜드(Ryker's Island)에서 복역하기도 하였다.
15살에 접어든 그녀는 극심한 인종 차별 속에서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나 베시 스미스(Bessie Smith)와 같은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접했고, 자신도 뉴욕의 나이트 클럽에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매춘부 출신으로 정식 음악교육을 받았을 리 만무했다. 더욱이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성량을 가지고 있어서 크고 힘있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수였다.
하지만 오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주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노래했다. 여러 클럽에서 노래하며 자신의 작고 끊어질 듯 한 보컬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어 내었고, 그녀가 만들어 내는 깨어질 듯한 감성과 극도로 우울한 분위기는 차츰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가수를 찾아다니던 명 스카우터 존 해먼드(John Hammond)에게 깊은 감명을 심어주게 된다. 이 때부터 전설적인 가수로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존 해먼드는 “최고의 가창력과 미모를 겸비한 새로운 여가수를 발견했다”며 언론을 통해 감동과 기대를 알려 나갔고, 그에게 동조한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함께 1933년 빌리 홀리데이의 첫 레코딩을 하게 된다.
베니 굿맨과 함께 'Your mother's son-in-law'와 'Riffin' the Scotch' 두 곡을 녹음했는데 어린 흑인 소녀에게 첫 녹음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후에 “마이크 앞에 서는 것이 처음이라 많이 두려웠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녹음 과정에서의 문제점들로 인해 첫 작품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첫 레코딩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보지 못한 그녀는 당시의 관습대로 로열티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겨우 35달러의 돈을 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다시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35년 대중 음악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아폴로 씨어터(The Apollo Theatre)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전 레코딩에서의 부족함을 완전히 극복해 내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역량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고, 아폴로극장에서의 돋보이는 활동은 그녀가 다시 레코딩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당시 그녀는 더 레이디(The Lady)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졌으며 이름 또한 철자가 확실치 않았는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Billie Holiday'로 확정했으며, 후에 그녀의 애칭 또한 그녀와 각별한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레스터 영(Lester Young)에 의해 레이디 데이(Lady Day)로 바뀌어지게 된다. 홀리데이는 레스터 영에게 대통령이란 의미의 '프레즈'(Prez)로 답례한다.
두 번째 레코딩에서는 감상적인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Teddy Wilson)을 만나게 된다. 테디 윌슨과의 만남은 빌리에게 큰 행운이었다. 테디가 지닌 감상적인 음악 스타일이 빌리가 지닌 감상적이고 음울한 보컬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졌고, 결국 빌리는 테디 윌슨과의 만남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테디와 함께 'I wished on the moon', 'Miss brown to you'등의 곡을 히트시킨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36년 그녀는 볼케리온(Vocalion)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후 카운트 베시(Count Basie)와 아티 쇼(Artie Shaw)의 그룹에서 노래하게 된다.
1938년 그녀는 백인 그룹이었던 아티 쇼(Artie Shaw)의 그룹에서 인종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그룹을 떠나게 된다. 솔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발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첫 대중적 성공을 가져다주었던 테디 윌슨, 그리고 그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던 음악적 동반자 레스터 영과 함께 재즈의 전설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1939년에 나온 명곡 'Strange fruit'는 그녀에게 첫 세계적 히트를 가져다주었는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아 좌파 지식인들이 애청하는 등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후 1940년대와 1950년대 그녀의 활동은 재즈 역사상 처음으로 대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뮤지션으로 음악사에 기록된다. 성공적인 솔로 전향 이후 그녀는 'Fine and mellow', 'Gloomy sunday', 'God bless the child', 'Lover man', 'Porgy', 'Good morning heartache', 'You better go now', 'Now or never'와 같은 무수히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내었으며,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었던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My sweet hunk o' trash'를 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초유의 성공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타고난 비운은 항상 뒤에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곁에는 항상 술, 담배, 마약이 있었고, 성공 행진을 거듭하던 40년대 이미 헤로인 중독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결혼생활 또한 불행의 연속이었는데 배우자에게 심한 학대를 받으며 살아간 것으로 전해지며 확실하진 않지만 두 차례의 이혼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마약과 술에 자신을 의지하게 된 이유를 배우자의 심한 학대 때문으로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극심한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노래하기 시작해 빈민가를 굴러다니던 보잘것없는 소녀의 신분 덕분에 레코드사로부터 부당한 돈을 받으며 음악생활을 해 나간 것과 다를 바 없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성장하고 진짜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때가 됐어도 경제적 여건은 좋아지지 않았다. 버는 돈의 대부분을 마약을 구입하는데 써버렸고, 결국 1947년과 1956년 마약 복용 혐의로 두 차례나 체포되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태로 향해 미끄러져 가는 와중에서도 음악이 전해주는 매력은 시들어 갈 줄 몰랐다는 것이다. 이제 대표작이 된 1958년의 은 삶의 마지막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 음악적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거하는 앨범으로, 수록곡인 'I'm a fool to want you', 'You've changed', 'The end of love affair'와 같은 곡들은 40여 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최고의 재즈 명곡들로 대접받으며 그 음악적 가치를 뽐내고 있다. 'I'm a fool to want you'는 1990년대 중반 국내 재즈음악 청취 붐의 기폭제가 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사망 1년 전인 58년 유럽 투어까지 감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는 이 유럽 투어 이후 급속히 건강이 약해져 59년 7월 뉴욕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하고 만다.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그녀는 그녀의 지독하게 우울한 삶과 같은 음울한 보컬을 통해 재즈 계의 전설로 자리한 인물이다. 사후에도 무수한 앨범들이 쏟아져 나와 정식 레이블을 통해 발매된 앨범만도 100여 장이 넘을 정도이며 생애를 담은 영화도 만들어 졌을 정도로 대중들이 그녀에게 품는 애정과 신비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용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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